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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ery Report

[미스터리 리포트]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 보고서

by 페오스타 2009.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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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 보고서

<참고 서적 남천우작 역사비평사, 유물의 재발견>
리포트를 쓰기전에 알아야 할것은 절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접근방법을 달리 해석할 뿐임을 명시한다.
우리나라 역사중 가장 존경 받는 장군의 죽음에 대해 소견을 말할뿐이지 절대 이순신 장군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순신 장군의 스토리는 배제 하고(너무나  잘 알고 있기때문에) 마지막 전투를 살펴보자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유탄을 왼쪽 겨드랑이에 맞고 전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라는 명언을 남기고 전사 하셨으며 그의 조카인 이완(李莞, 1579∼1627)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끝까지 독전(督戰)하여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전후 조정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선무일등공신을 수여하고 충무공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전해 진다.

아직까지 장군의 죽음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물론 역시시료에서 정확히 장군의 전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여러부분이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때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을 살펴보자

이순신 장군의 해군은 거의 불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본은 물론 명나라에서까지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

알려 졌을 정도였다. 적군에서 조차도 존경 받은 이순신이였다. 그렇다면 그 수하들과 이장군이 직접

머무는 곳의 일반 백성들은 어느 정도였을까? 과히 당시 선조와 버금가는 존경의 대상이였을 것이다.

또한 선조의 조선 조정은 임란 당시 도망치기 바빴고 집권자들의 전쟁 수행능력은 거의 몰락 수준이었고

오히려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의 전투가 훨씬 효과적이었다. 이미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선조라는 왕보다

조헌, 고경명, 곽재우, 김덕령등의 의병장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의식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무능한 조정보다는 이러한 의병장에 대한 믿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물론 조정은 이러한 외부적 의식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었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의 집권층들은 전쟁이외에 이러한 내부의 적에 대한 견제를 더욱더 민감시 하고 있었다.

그러한 예로 첫번째 희생자가 김덕령 장군이다. 무고하게도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31살의 나이에 처형된다. 그가 한것이라고 나라를 위한 충정뿐이였다.

이에 대한 이민서(李敏敍)의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기록을 보면 "김덕령 장군이 죽고부터는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혹하고 또 스스로 제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저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호남과 영동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들 경계하였다는 것이다." 라고 했을 정도였다.

전쟁중에서도 이럴지경인데 전쟁이 끝나면 대대적인 숙청이 있을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2번의 백의종군을 겪은 이순신 장군은 이 부분을 무엇보다 뼈에 사무치게 느꼈었고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부하들까지도 함께 걱정 해야 할 부분이였다.

선조와 그 측근들은 대의 명분을 내세워 의병장과 이순신을 제거함이 가장 좋았으므로

역모를 조작하는 방법이 제일 좋았던 것이다. 가령 왜군을 힘껏 치지 않았다거나 월권행위를 했다거나

명령 불이행을 죄목으로 씌여 장군뿐만 아니라 휘하의 모든 장수들을 엮어서 죽일것이 분명했기때문이다.

 


전쟁에 이겨도 죽고, 져도 죽고, 이런 상황에서 장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고뇌가 하늘을 무너뜨리고도 남았음이다.

그때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적은 반드시 섬멸해야 했고 전후 자신은 물론 가족과 휘하 장군들의 운명 또한 뻔히 들어난 판국이였다.

그것은 장군뿐만 아니라 장군을 직접 모셨던 각 장군들도 마찬가지였을것이다.

그러한 고민을 장군 혼자 담당했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리 저리 말이나 의견들이 다수 나왔을 법 하지 않은가?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인 소견은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전사함을 택하여 조정을 우환을 미리 없애

가족과 휘하 장수들을 살리는 방법...

조금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후 그 여세를 몰아 정권을 전복시키던가...

아니면 전후 은둔해서 남은 여생을 보낼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이였것이다.

 

노량해전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첫번째 역사 기록대로 전사한 경우이다.

당시 상황을 가장 세세히 묘사한것이  안방준의[노량기사(露梁記事)] 이다.

노량기사(露梁記事)》에 따르면

송희립(宋希立)이 적탄을 이마에 맞아서 갑판 위에 쓰러져 기절(氣絶)하게 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다가 그도 또한 적탄(敵彈)에 쓰러지게 되었는데, 기절하였다가 정신을 차린 송희립은 옷을 째어 이마 상처를 동여매고 앉으려 하니, 이순신의 아들인 회(?)가 곡(哭)을 하는지라, 송희립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이순신의 갑옷을 풀어 그 시체(屍體) 위에 얹어 놓게 하고,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치(旗幟)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독전(督戰)하니, 적군(敵軍)은 대패(大敗)하고 익사(溺死)하는 자 무수(無數)하고, 드디어 둔주(遁走)하거늘, 이에 비로소 이순신의 곡(哭)을 발(潑)하였다. 뒤에 공(功)으로써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任命)되었다.

— 《노량기사(露梁記事)》

라고 기재되어 있다.  '행록' 조합해 보면 지휘권을 송희립이 넘겨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부분의 사료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인정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행록에 의존하여 은둔설을 제기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시 이순신장군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유성룡이 실권했던 날이기도 했다.

당시 유교적 사상이 매우 강한 사회적 기반위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그것도 적의 흉탄을 위해 갑옷조차 입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는 몇몇 사료에 등장하기는 합니다.

그 추측의 이야기가 나온것이 바로 금산군 이성윤의 노량 충렬사에 써 붙인 싯구 때문입니다.

'공로 커도 상 못 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心知功大 終難賞志 決身殲 意露肝)
(금산군 이성윤[1570∼1620]'

 

또한 김덕령 장군의 전기를 썻던 이민서의 내용중에 이러한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

'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李舜臣方戰 免甲自中丸以死)(이민서[1633∼1688]'

 

과연 이순신 장군이 적의 흉탄을 빌어 순국을 선택 했을까요?

유교사상의 지배적 시대에 자살이라 함은 가장 극한의 선택이였을것이며 장군의 입장에서 쉬이 생각할수 없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주장된 것이 소위 자살설입니다.

그러한 토대로 주장된 것이 "이순신 장군은 사천 해전 당시 어깨를 관통한 상처 때문에 고생하였고 이를 위해 특별히

개발된 방탄조끼 형식인 '환삼'도 벗어 젖히고, 아예 처음부터 갑옷도 입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용복만을

입은 채 아침 8시의 빛나는 태양 아래 왜군의 조총병 정조준거리에서 선두 지휘하였다" 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기부여는 확실한 상황이였지만 유대적 사고로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적앞에 갑옷을 걸치지 않고 나서는 것도 이상한 행위이고 그러한 모습을 이순신 장군을 옆에서 보필하는

각 예하 장군들이 가만 있었겠습니까? 전함의 지휘소는 수병들이 방패를 둘러 싸고 엄중히 경계하는 곳입니다.

정말 모든것이 계획된 자살이라는 말은 정말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당시 해전 중기단계였습니다. 아직 적을 섬멸하여 승리라는 요건을 가져 오기 전이였죠.

정말 자살하기 위해서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면 가장 중요한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도외시 하고

자살하는 장군이 세계 어디에 있을까요? 꼭 적의 흉탄을 빌어 자살해야 할까요? 나라의 안위를 가장 걱정했던

이순신 장군이였습니다. 자살은 유교적 세계관에서도 절대 납득이 안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이민서의 '갑옷을 벗고(免甲)...'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까요? 이에 대해 어떤 분은 이것은 진(晉)나라 장수 선진(先軫)의 고사에서 나온 고사 구절의 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즉 '갑옷을 벗고 앞으로 나선다'라는 의미의 '면주선 등(免胄先登)'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의미보다는 '용감하게 앞선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하면 당시 이순신 장군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맏아들 회, 조카 완등 친족이외에 실제적으로 장군의 죽음을 증명한 사람이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허나 안방준의 노량기사를 보면 송희립이 전권을 위임 받아 지휘 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부분에 대한 의문점은 당시 극박한 전투 상황이였고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전투를 충분히

지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이순신의 첫째아들인 회와 조카인 완등은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신출내기였습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기 직전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조카에게 지휘를 넘겼을까요?

이부분에서는 노량기사에 기술된대로 송희립이 맡았을 것입니다. 송희립은이순신 장군이 전사후

전 수군을 진두지휘 할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장군입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가장 고민하게된 한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노량해전을 통해 본 각국의 전사자수는

수만을 헤아립니다.

특히 왜군의 전사자는 수만명입니다. 그에 비해 조선의 수군은 수천에 불과 합니다.

헌데 전사자 의 면면을 살펴보면 제독 이순신 장군과 조방장, 이영남, 이언량등 당대 조선 수군 최고의 명장들이

줄줄이 전사하였습니다. 지금 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거의 불사신과 다름없는 용맹으로 살아 돌아온 명장들입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최 측근들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이들이 모조리 전사한것입니다

그리고 한때는 무장봉기설도 있었는데 정말 이부분은 말도 안되는 억측이기때문에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배경상 그러한 생각을 유추해 볼수도 있지만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라고 짤라 말하고 싶네요.

가장 의문점을 주는 사실은 은둔설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나라를 위해 충절을 지키고 우매한 조정의 눈을 피할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이방법 또한 이순신 장군이 선택했을까요? 그때는 살고 싶다는 본성이 지배적일거라는 사람들의 말은

한마디로 묵살해 버리고 싶습니다. 그때 전쟁은 하루에도 수천면이 죽어 가가는 형국입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죽어 갔을까요? 바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이 한몸 바쳐 충절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덕이자 명예였고 죽음앞에 초연했을 시기입니다.

나하나 살고저 죽음을 은폐하여 책략을 구상하는 시기는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다 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보죠.

전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는 유형(柳珩)과는 속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 하는 사이였습니다.

이 유형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속내를 토로 하기를...

"옛부터 만약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아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대게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에 죽음으로써 유감이 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1711년에 이여가 쓴 정탁의 구명 상소문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공로가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움을 스스로 느끼고

마침내 싸움에 이르러 자기 몸을 버렸으니 이순신의 죽음은 미리부터 계획한 것이었다고들 말하는데

그때의 경우와 처지로 보면 그말에 혹시 타당한 점도 있다 하련가! 아 슬프도다."

라고 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장군의 심중 말은 전후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화양(華陽)으로 풀어보내는 날이 오면(전쟁이 끝나면)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라는

표현을 봐도 충분히 알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우메한 후인이 생각하기를...

"인간 이순신으로 돌아갔을 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은둔이 가장 최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즉 마지막 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위장하며 측근인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

럼으로써 가족들을 구하고 자신을 따르던 충직한 부하들이 욕되게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자신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들을 추론해 내는데 확실한 증거들은 아닙니다. 다 추론일뿐이죠.

위와 같이 평소 심중생각을 표현한 이순신 장군의 말과

노량해전이 벌어진 시간대를 주목합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구사했기때문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을

임했으나 노량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야음을 틈타 도피 하게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만

역시 추정 가설일뿐입니다.

두번째 이상하게 행록의 기술들을 많이 거론 하는데.. 행록은 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기록한 당시 사건들의 기록지가 행록입니다.

이 행혹을 보면 노량기사와 달리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을시 주위에는 맏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김이뿐이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맏아들 회와 조카 완(본인)이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부분이 노량기사와 많이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노량기사는 당시 구전을 듣고 저술된 기록서이지만..

이 행록이야 말로 당시 현장에 있었던 조카 완의 생생한 경험으로 부터 나온것이여서 무게 중심을 이 행록에

두는 것입니다. 당시 맏아들 회와 조카완은 전투경험이 별로 없는 신출내기나 다름 없었는데

전쟁수행능력이 뼈에 각인될 만큼 출중한 장군들이 수두룩 했는데 왜 이 두사람에 지휘권을 넘겼을까요?

그리고 중요한 장군들이 거의 전사했습니다. 노량해전에서..

당시 장군이 사망한 날이 1598년 11월 19일 이였으며 54세 였습니다.

해전후 장군의 시신은 20일 뒤인 12월 10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집니다.

조정에서 장례비용을 부담했고 그 당시 풍습상 오랫동안 시신을 방치 하지도 못합니다.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된 다음해 2월11일에 치러집니다.

그리고 그후로 15년 뒤 1614년에 이장됩니다.

은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부분에 많은 주목을 하고 있는데.. 왜 이장을 했을까입니다.



당시 아산의 이순신 장군의 묘는 바로 두사충이 점해준 자리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명과의 관계를 유지할때 특히 풍수사에 관심이 많아 직접 교유관계를 맺은 사람이 명의 유명한 풍수가인

두사충(杜師忠)이였습니다. 두사충과는 임란초기부터 장군이 전사할때까지 교우관계를 유지했으며

많은 풍수학적 지식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런 두사충이 직접 아산까지 와서 무덤자리를 봐 주었는데

(충남 아신시 음봉면 산정마을뒷) 왜 그런 유명한 풍수가가 점해준 명당을 버리고

1km떨어진 곳에 다시 이장을 했을까요?

두사충에 관한 사실은 충무공의 직계 후손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저 7대손인 이인수(삼도통제사 역임)가

두사충을 위해 신도비문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이 신도비문에서 그는 충무공의 묘지 소점에 대한

고마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 풍수이자 오랜 친구가 잡아준 자리를 버리고 굳이 이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리가 나빠서였을까? 만약 그랬다면 훗날 충무공의 손자가 다시 그 자리에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역화되기 이전의 현충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재엽씨는 어른들에게서 충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많이 들어왔다. 그런 그도 16년 만의 이장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만을 들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당시 명풍수 두사충이 잡은 자리에 안장된 것을 안 왕실에서

그 후손들의 명당발복을 두려워하여 알게 모르게 이장을 강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도 억측 가운데 하나다.

소문난 명당을 빼앗아 왕릉이나 태실(태실.왕실에서 태를 묻던 석실)로 활용함으로써  신하들의 명당발복을

견제했던 당시 왕실의 관행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허나 그에 반해서 '충훈부등록'의 기록을 보면 또 그러한 부분을 반박할 수 있다.

충훈부등록과 선조실록들의 기록을 보면 당시 전란직후 제대로된 장례를 치루지 못해

조정에 상소해 정당한 대우를 받고 그에 걸맞는 장례를 치루기를 왕께 상소하였습니다.

당시 평난공신 해성군 최황이 처음 광주 땅에 장사지냈다가 이제 장차 장단으로 이전함에 앞서

훈구노신의 상례이므로 이제 영폄하는 마당에 참작하여 윤허를 바랬다.

충훈부의 계사에 대해서 전료하신 것이 이러이러하셨습니다. 최황은 공신으로 의정을 추층받았으니

천장할 때에 관곽과 석회, 조묘군을 상교에 의하여 각 해사로 하여금 제급하게 하는 것은 극히

윤당하기에 감히 아랍니다. 라고 하니 임금께서 윤허한다라고 전교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전교하기를, 「최황이 천장한다고 했을 적에 본가(本家)의 힘에 부족한 바가 있으면,

〈경이 의당 형편에 따라 돕도록 하라.〉고 감사에게 하유했었고, 이러한 전례가 있으니 

금번의 이순신의 개장(改葬)에도 이러한 전례에 의거하여 일체 시행하는 것은 마땅할 듯하다.

그러니 본가의 여력으로 부족한 바가 있으면 형편에 따라 돕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으니 

공홍도(公洪道) 감사에게 하유하라.」고 하였다. 충훈부등록 1614년 4월 17일.



이와 같이 당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장례를 치른 충절들에 대한 상소가 많았고

이를 상장(喪葬)이라 했다. 또한 공신에 대한 예장으로 4품이상은 3개월, 5품 이하는 달을 넘겨서

장례를 치른다라고 하였다.

재조(再造, 임진왜란) 이후에 사대부들이 술사(術士)를 숭배하고 믿었다.

그래서 비록 멀고 오래된 조상의 무덤일지라도 다시 길지(吉地)를 택해서 이장하여 편안하게 두었으며,

부모의 묘에 이르러서는 비록 길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산이 좀더 좋다고 하면 이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아 두세 번에 그치지 않았다.

 

이를 보면 당시의 상황적 배경에 따라 이순신 장군의 묘 이전이 납득이 간다고 말한다.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장군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어찌보면 꺼내지 조차 민망한 사인일 수도 있다.

후인이 감히 미스터리 라는 단어를 빌미삼아 죽음에 대해 논할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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